여기저기로 떠도는 술잔, 빛을 받아 초록색으로 빛나는 병, 난잡하게 뒤엉킨 사람들의 목소리가 승관의 고막을 찢을 듯 울려퍼졌다. 다들 어디서 배워먹은 술자리 매너야. 직장생활 하면서 사회물을 좀 먹더니 회식자리의 끝까지 남아서 자리를 지키는 부장님 같아졌다. 다들. 차라리 제시간에 와서 같이 취했으면 좀 나았으려나.
- 어, 부승관이다 부승관!
- 부승관?
어 그래, 내가 바로 부승관이다. 3학년 5반의 반장. 이 꼴통반의 빛, 소금. 아니, 돼지 말고. 내가 왜 5반 대표 돼지야. 술 처먹고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오랜만에 다들 모인 동창회라길래 있던 약속도 일찍 끝내고 늦었지만 얼굴이라도 비추려고 왔더니. 사실 진짜 목적이 따로 있긴 했지만. 다들 어릴 때 고삐 풀린 망아지 같던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이젠 좀 개같다. 너네. 어후, 아니야 난 좀 사양할게. 쏟아지는 관심-물론 초록색 병과 같이-에 예전 반장선거 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열심히 손과 고개를 저으며 돌아다니다가도 아직까지 사람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야, 그래. 멀쩡한 인간도 한 둘은 있어야지. 그렇게 웃으면서도 어디 앉으면 좋을지 열심히 주변을 훑고 있는데 왠 두꺼운 손이 순식간에 내 손목을 낚아챘다. 어머, 핏줄 좀 봐. 순간 두근거리는 심장에 사랑에 빠진 소녀, 아니 소년의 표정을 지으며 손목에 핏줄이 팍, 서있는 아주 바람직한 손의 소유자를 올려다보니. 오, 주여. 아직 10시밖에 안됐는데 눈은 반쯤 풀려서는 실실 웃으며 소주병을 건네는 익숙한 얼굴에 승관은 기함을 토해냈다.
이석민이네. 응, 이석민이야. 어멋, 왜 이러세요! 하고 내숭과 애교를 뱉어내야 할 말상대가 아니라, 그냥 말이었다. 어정쩡하게 서서 눈을 꿈뻑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날 보고 실실 웃더니 꺼내는 말이 가관이다.
- 우리 부승아 노래 한 곡만 하자!
- 뭔 개소리야!!
이 새끼는 5년이 지나도 변한게 하나 없다. 변한게.
- 아 왜, 한 곡만 하자니까? 너 노래 잘하잖아!
- 싫어, 그리고 부승아라고 부르지마라 너.
- 우리 승아를 승아가 아니면 뭐라고 불러~
재수 없는 새끼. 아주 한결같네. 이석민은 자기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나를 부승아라고 부를 놈이다. 나쁜 놈. 도대체 몇 년을 우려먹는지 모르겠다. 내가 여장대회에 나가서 상을 탄 덕분에 햄버거를 얻어먹었으면서.
석민의 웃는 낮짝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주고 나서야 그나마 조용한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은 승관은 그제서야 한숨을 돌리며 제 앞에 쌓여있는 땅콩을 까먹기 시작했다. 5년 만에 온 동창회에서 땅콩이나 까먹는 신세라니. 부승관 신세 참 처량하다. 저 미친개들 때문에. 그나저나 쌤은 언제 오려나. 승관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껍질이 덜 벗겨진 땅콩을 어금니로 으적으적 씹으며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쌤, 쌤이라도 있어야 내가 이 개판을 헤쳐나가지요.
쌤, 여기 벌써 개판이에요.
사탕말고 헛개수 사오셔야 할 듯.
어디세요? PM 10 : 23
우리 반장 뒤. PM 10 : 24
언제 벽이 되셨어요. 몰랐네. PM 10 : 24
ㅋㅋㅋㅋ다왔어. 조금만 기다려. PM 10 : 25
예, 저는 뭐 선생님이 기다리시라면 얌전히 땅콩이나 뜯으면서 기다리고 있어야지요. 선생이 오랜만에 학생을 보러 가는데 맨 손으로 갈 수 없다며 근처 편의점에서 사탕이나 사오겠다더니 사탕을 만들어오기라도 하는지, 편의점으로 간 시간으로부터 정확히 23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근데 지금 사탕이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쌤. 당장 이석민 눈에 잘못 걸리면 내가 여기서 여장하고 노래 부르게 생겼는데. 근데 쌤은 그런 거 좋아한다. 내가 쪽팔려 하는 거. 분명 내가 여장대회에 나갔을 때도 특유의 해맑은 -‘바보같은’이 더 맞는 표현 같지만.- 웃음을 지으며 입을 헤-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쌤 그런 눈빛으로 학생 보면 팔찌차요. 은색 팔찌. 쪽팔림에 툭 쏘아붙이는 말에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눈이 접히도록 예쁜 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잡아 토닥였다. 생각해보니, 이 때부터 쌤이 나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봤던 거 같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빛. 여장한 거에 반했나?
어쨌든 독이 바짝 올라 여기저기 나를 찾는 이석민의 시야에 들지 않기 위해 어느새 190은 훌쩍 넘어버린 것 같은 김민규의 뒤에 숨어 휴대폰 액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쌤 빨리 와요. 이 나이에 내가 숨바꼭질까지 해야겠어?
10분, 20분. 아니 조금만 기다리라며! 도대체 이 쌤은 다온 것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 다 왔다가 다시 숙취해소제 사러 내려간 거 아냐? 아니, 보통 선생이 뭘 사옵니까? 제자들이 양 손은 무겁게, 마음은 가볍게 해서 찾아가야지. 사탕을 진짜 만들어서 오나봐! 승관은 혼자 격렬하게 투덜거리며 땅콩을 거칠게 비틀었다. 무언가의 살기까지 느껴지는 승관에 그 앞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던 민규는 흐르는 땀을 얌전히 훔칠 수 밖에 없었다. 승관이 중얼거리는 말들이 향하는 대상을 걱정하면서.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이목이 문 앞에 선 누군가에게 집중되었다. 누구 올 사람 또 있었어? 아니, 없는데. 그럼 저 사람은 누구야? 몰라. 누구세요? 양 손에 가득 짊어진 비닐봉지,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운 사탕과 숙취 해소제에 승관은 제 얼굴을 양 손을 감쌌다. 아, 쌤 술 먹이지 말 걸. 오랜만에 데이트라 신나서, 신나서 그랬다. 오랜만에 제자들을 만나 떨린다는 쌤에게 그럼 술이라도 한 잔 하고 들어가라고 권유한 내가 잘못이지. 응. 다 부승관 잘못이네. 저 쌤은 멀쩡한 것 같더니. 취했으면 취했다고 말을 하던가. 그럼 같이 갔을 거 아니야. 아까 문자할 때 손가락은 멀쩡하더니.
비닐봉투의 묵직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문 앞에서 휘청거리는 한솔을 바라보던 승관은 내 팔자가 이렇다며 한숨을 폭폭 내쉬며 한솔의 앞으로 다가갔다.
- 쌤, 정신 좀 차리죠?
- 어, 반장. 나 완전 멀쩡한데?
지랄. 차마 쌤 앞에서 뱉어내지 못할 말을 입 안으로 삼키고 쌤의 한 손에 쥐어진 비닐봉투를 뺏어 들었다. 쌤한테도 무거운 정도였으니, 진짜 들자마자 땅에 박히는 느낌이었다.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숙취해소제와 사탕이 섞여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탁자위에 올려놓으니 쌤과 내게로 아이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맨날 내가 뒤처리 담당이지.
자, 다들 주목. 이 쪽은 우리 3학년 5반의 담임, 최한..
한솔 쌤?!
어, 그래. 말 안해도 다 아네. 나 왜 세워놓은 거야. 제 말이 끊기자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리는 승관을 귀엽다는 듯 바라본 한솔이 승관의 붉은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승관이 샐쭉이며 한솔을 노려봤지만, 한솔은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일 뿐이었다.
야, 한솔 쌤이래. 뭐? 담임? 어, 담임! 순식간에 동그래진 친구들의 눈에 승관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아직 애네. 애야. 그래, 얘들아. 5년만에 쌤 만나서 좋은 건 알겠는데. 좀, 좀 진정해봐. 나 아직 말 덜 끝났..
- 미친, 한솔쌤!!!
응, 나는 뭐 투명인간이지요. 제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미친 망아지처럼 달려드는 아이들에 승관은 한솔과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다 또 다시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는 한솔에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옆의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 빈 소주잔에 소주를 따랐다. 제가 자작을 하는 모습은 5년만에 만난 선생님을 반기는데 여념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기 얘들아. 나도 5년만에 만난 반장이거든.
- 근데 쌤.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요?
- 맞아, 애들끼리 말해서 온건데?
- 아, 반장이 같이 오자고 해서.
반장? 승관이가요? 승관은 갑자기 자신에게 주목된 시선에 전처럼 눈을 느릿하게 두어번 껌뻑이고는 제 잔에 따르던 소주병을 내려놓았다. 왜, 뭘 봐. 자작하는 사람 처음 봐? 승관의 톡 쏘아붙이는 말투에 아이들은 주변의 눈치를 슬슬 살폈고, 한솔은 비식비식 웃음을 터트렸다. 곧이어 승관과 눈을 마주쳤고, 승관이 과장되게 표정을 구겨보았지만 승관의 표정은 슬그머니 새어나오던 한솔의 웃음에 불을 지피는 도화선이 되었을 뿐이었다. 어느새 크게 터져버린 한솔의 웃음에 아이들이 한솔과 승관을 번갈아 바라보며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보이자 승관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잔을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한솔을 꽤나 날카로운 표정으로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쌤 때문에 수명이 줄어요. 알아? 한솔은 제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여전히 큭큭 웃고있었다. 손으로 웃음을 가릴거면 그 소리도 좀 어떻게 해보던가.
- 아, 미안 미안. 사실 말해줄 게 좀 있어서 왔어.
- 말해줄 거요?
- 응, 반장이 말해줄거야.
여전히 아이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솔과 승관을 번갈아 바라보았고, 승관은 입술을 오물거려가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그렇다고 보이지까지 않는 건 아니지만- 비속어를 중얼거리며 한솔의 옆에 섰다. 쌤이 제일 나빠요 진짜. 아, 그 어깨 좀 가만 놔둬요! 좀!
한참을 투닥이던 한솔과 승관은 저들에게 주목된 시선을 민규가 알려주고 나서야 자세를 바로하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5년 전처럼.
- 그러니까.. 쌤이...
- 결혼한대.
아, 그래. 결혼. 결혼.. ...결혼?! 쌤 결혼해요?!? 결혼이라는 말을 몇 번 되뇌이던 아이들은 승관의 말이 끝난 후 약 3초정도의 정적을 깨고 주변 10m 내의 사람들을 모두 깨우려는 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승관은 귀를 막고 한 명씩 말하라며 꽥꽥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한솔은 예의 그 어깨를 으쓱이며 승관에게 물어보라며 책임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35명의 아이들 모두의 시선과 질문이 승관에게로 쏟아진 것이다. 알았어. 말, 말해줄테니까 좀. 좀 조용히. 아니, 좀.. 좀..!
- 다 닥쳐!!!!
승관의 화가 잔뜩 섞인 고함에 식당 안이 쥐 죽은 듯이 얼어붙었다. 누군가의 놀란듯한 딸꾹질 소리와 제 분에 못이긴 승관이 씩씩거리는 소리만 제외한다면 완벽한 고요였다. 내가, 말, 해준다고, 했잖아!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한 음절, 한 음절 뱉어내는 승관의 얼굴색이 제 머리색과 똑같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제서야 자각했다. 아, 부승관 존나 빡쳤구나.
한참을 쏟아진 승관의 잔소리에 아이들과 한솔은 얌전히 손을 모으고 승관의 화가 다 풀리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야, 그래도 오랜만에 부승관 히스테리 들으니까 예전 생각도 나고 좋지 않.. 응, 그래 좋지 않구나. 미안. 한참을 꽥꽥 소리 지르던 승관의 화가 끝나고 나서야 조금 정리된 술자리의 분위기에 석민이 능글거리며 아이들에게 꺼낸 말은 꺼내자마자 짜게 식었다. 내가 졸업하고 나서도 부승관 히스테리를 들을 줄이야. 아이들의 원망 섞인 눈초리가 승관을 향하자 계란찜을 조금씩 떠먹던 승관은 차게 식은 눈동자로 욕을 하고있었다. 우리 그냥 술이나 마시자. 응 그래 급우야, 좋은 생각이다.
- 근데, 그래서 쌤 누구랑 결혼해요?
- 어? 나?
- 네, 쌤이요.
- 어.. 그니까..
한 제자의 말에 조금은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한솔은 말을 더듬다 이내 제 옆자리에서 계란찜을 떠 먹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고, 입꼬리를 느릿하게 올려 웃으며 말했다.
- 반장이 알려줄거야.
한솔의 말에 승관은 계란찜을 떠먹다 말고 목에 무언가 걸린 듯 켁켁거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한솔은 그런 승관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저런, 급하게 먹으면 안돼. 반장.
- 아니, 쌤은 왜 다 나한테 떠넘겨요?
- 그게 편하니까.
- 와 진짜 무책임하다.
입에 넣던 숟가락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내뱉은 말에 한솔은 헝클어진 승관의 앞머리를 정리해주며 사람 좋은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또, 또 저 웃음. 내가 저거 제일 약한 거 아니까 저러는거다. 영악해. 맨날 악역은 나한테 맡기죠. 여자애들이 쌤 얼마나 좋아하는 지 알면서.
승관은 몇 번째일지도 모르는 한숨을 내뱉으며 제 주머니를 뒤지더니 탁자의 가운데로 말끔한 봉투에 들어있는 종이를 하나 꺼내 던졌다. 니네 다 강제참가야. 라고 말하면서.
기회 좋게 종이를 낚아챈 석민은 종이를 낚아채자마자 펼쳐서 크게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 결, 혼. 2016년 5월 25일 성수웨딩홀, 2층 세ㅂ...
- 아 이석민 진짜 쓸모없는 거만 읽어.
한껏 짜증을 내며 석민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챈 민규는 크고 빠르게 종이의 내용을 줄줄 읽어가기 시작했다.
- 2층 세봉 홀, 신랑 최 한솔. 신부 부 승관. 거참 신부 이름 되게 남자같네요 쌤.
- 그러게, 부승관이래 부승관. 되게 특이하다.
- ...부승관?
- 어, 부승관. ...잠깐만.
민규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고, 석민은 고개를 돌려 얌전히 눈을 내리깔곤 막대사탕 하나를 까서 입 안에 넣는 승관을 바라보았다. 주변이 순식간에 가라앉은 듯 조용해지고 적막이 찾아오자 승관은 곱게 닫혀있던 눈꺼풀을 들어올리고는 눈꼬리가 사르르 접히게 웃어보였다.
- 나 결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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