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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로 떠도는 술잔, 빛을 받아 초록색으로 빛나는 병, 난잡하게 뒤엉킨 사람들의 목소리가 승관의 고막을 찢을 듯 울려퍼졌다. 다들 어디서 배워먹은 술자리 매너야. 직장생활 하면서 사회물을 좀 먹더니 회식자리의 끝까지 남아서 자리를 지키는 부장님 같아졌다. 다들. 차라리 제시간에 와서 같이 취했으면 좀 나았으려나.

 

- 어, 부승관이다 부승관!

- 부승관?

 

어 그래, 내가 바로 부승관이다. 3학년 5반의 반장. 이 꼴통반의 빛, 소금. 아니, 돼지 말고. 내가 왜 5반 대표 돼지야. 술 처먹고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오랜만에 다들 모인 동창회라길래 있던 약속도 일찍 끝내고 늦었지만 얼굴이라도 비추려고 왔더니. 사실 진짜 목적이 따로 있긴 했지만. 다들 어릴 때 고삐 풀린 망아지 같던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이젠 좀 개같다. 너네. 어후, 아니야 난 좀 사양할게. 쏟아지는 관심-물론 초록색 병과 같이-에 예전 반장선거 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열심히 손과 고개를 저으며 돌아다니다가도 아직까지 사람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 그래. 멀쩡한 인간도 한 둘은 있어야지. 그렇게 웃으면서도 어디 앉으면 좋을지 열심히 주변을 훑고 있는데 왠 두꺼운 손이 순식간에 내 손목을 낚아챘다. 어머, 핏줄 좀 봐. 순간 두근거리는 심장에 사랑에 빠진 소녀, 아니 소년의 표정을 지으며 손목에 핏줄이 팍, 서있는 아주 바람직한 손의 소유자를 올려다보니. , 주여. 아직 10시밖에 안됐는데 눈은 반쯤 풀려서는 실실 웃으며 소주병을 건네는 익숙한 얼굴에 승관은 기함을 토해냈다.

 

이석민이네. , 이석민이야. 어멋, 왜 이러세요! 하고 내숭과 애교를 뱉어내야 할 말상대가 아니라, 그냥 말이었다. 어정쩡하게 서서 눈을 꿈뻑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날 보고 실실 웃더니 꺼내는 말이 가관이다.

 

- 우리 부승아 노래 한 곡만 하자!

- 뭔 개소리야!!

 

이 새끼는 5년이 지나도 변한게 하나 없다. 변한게.

 

- 아 왜, 한 곡만 하자니까? 너 노래 잘하잖아!

- 싫어, 그리고 부승아라고 부르지마라 너.

- 우리 승아를 승아가 아니면 뭐라고 불러~

 

재수 없는 새끼. 아주 한결같네. 이석민은 자기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나를 부승아라고 부를 놈이다. 나쁜 놈. 도대체 몇 년을 우려먹는지 모르겠다. 내가 여장대회에 나가서 상을 탄 덕분에 햄버거를 얻어먹었으면서.

 

석민의 웃는 낮짝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주고 나서야 그나마 조용한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은 승관은 그제서야 한숨을 돌리며 제 앞에 쌓여있는 땅콩을 까먹기 시작했다. 5년 만에 온 동창회에서 땅콩이나 까먹는 신세라니. 부승관 신세 참 처량하다. 저 미친개들 때문에. 그나저나 쌤은 언제 오려나. 승관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껍질이 덜 벗겨진 땅콩을 어금니로 으적으적 씹으며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 쌤이라도 있어야 내가 이 개판을 헤쳐나가지요.

 

, 여기 벌써 개판이에요.

사탕말고 헛개수 사오셔야 할 듯.

어디세요? PM 10 : 23


우리 반장 뒤. PM 10 : 24


언제 벽이 되셨어요. 몰랐네. PM 10 : 24

 

ㅋㅋㅋㅋ다왔어. 조금만 기다려. PM 10 : 25

 

 

, 저는 뭐 선생님이 기다리시라면 얌전히 땅콩이나 뜯으면서 기다리고 있어야지요. 선생이 오랜만에 학생을 보러 가는데 맨 손으로 갈 수 없다며 근처 편의점에서 사탕이나 사오겠다더니 사탕을 만들어오기라도 하는지, 편의점으로 간 시간으로부터 정확히 23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근데 지금 사탕이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 당장 이석민 눈에 잘못 걸리면 내가 여기서 여장하고 노래 부르게 생겼는데. 근데 쌤은 그런 거 좋아한다. 내가 쪽팔려 하는 거. 분명 내가 여장대회에 나갔을 때도 특유의 해맑은 -‘바보같은이 더 맞는 표현 같지만.- 웃음을 지으며 입을 헤-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쌤 그런 눈빛으로 학생 보면 팔찌차요. 은색 팔찌. 쪽팔림에 툭 쏘아붙이는 말에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눈이 접히도록 예쁜 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잡아 토닥였다. 생각해보니, 이 때부터 쌤이 나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봤던 거 같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빛. 여장한 거에 반했나?

 

어쨌든 독이 바짝 올라 여기저기 나를 찾는 이석민의 시야에 들지 않기 위해 어느새 190은 훌쩍 넘어버린 것 같은 김민규의 뒤에 숨어 휴대폰 액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쌤 빨리 와요. 이 나이에 내가 숨바꼭질까지 해야겠어?

 

10, 20. 아니 조금만 기다리라며! 도대체 이 쌤은 다온 것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 다 왔다가 다시 숙취해소제 사러 내려간 거 아냐? 아니, 보통 선생이 뭘 사옵니까? 제자들이 양 손은 무겁게, 마음은 가볍게 해서 찾아가야지. 사탕을 진짜 만들어서 오나봐! 승관은 혼자 격렬하게 투덜거리며 땅콩을 거칠게 비틀었다. 무언가의 살기까지 느껴지는 승관에 그 앞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던 민규는 흐르는 땀을 얌전히 훔칠 수 밖에 없었다. 승관이 중얼거리는 말들이 향하는 대상을 걱정하면서.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이목이 문 앞에 선 누군가에게 집중되었다. 누구 올 사람 또 있었어? 아니, 없는데. 그럼 저 사람은 누구야? 몰라. 누구세요? 양 손에 가득 짊어진 비닐봉지,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운 사탕과 숙취 해소제에 승관은 제 얼굴을 양 손을 감쌌다. , 쌤 술 먹이지 말 걸. 오랜만에 데이트라 신나서, 신나서 그랬다. 오랜만에 제자들을 만나 떨린다는 쌤에게 그럼 술이라도 한 잔 하고 들어가라고 권유한 내가 잘못이지. . 다 부승관 잘못이네. 저 쌤은 멀쩡한 것 같더니. 취했으면 취했다고 말을 하던가. 그럼 같이 갔을 거 아니야. 아까 문자할 때 손가락은 멀쩡하더니.

 

비닐봉투의 묵직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문 앞에서 휘청거리는 한솔을 바라보던 승관은 내 팔자가 이렇다며 한숨을 폭폭 내쉬며 한솔의 앞으로 다가갔다.

 

- , 정신 좀 차리죠?

- , 반장. 나 완전 멀쩡한데?

 

지랄. 차마 쌤 앞에서 뱉어내지 못할 말을 입 안으로 삼키고 쌤의 한 손에 쥐어진 비닐봉투를 뺏어 들었다. 쌤한테도 무거운 정도였으니, 진짜 들자마자 땅에 박히는 느낌이었다.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숙취해소제와 사탕이 섞여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탁자위에 올려놓으니 쌤과 내게로 아이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맨날 내가 뒤처리 담당이지.

 

, 다들 주목. 이 쪽은 우리 3학년 5반의 담임, 최한..

한솔 쌤?!

 

, 그래. 말 안해도 다 아네. 나 왜 세워놓은 거야. 제 말이 끊기자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리는 승관을 귀엽다는 듯 바라본 한솔이 승관의 붉은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승관이 샐쭉이며 한솔을 노려봤지만, 한솔은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일 뿐이었다.

 

, 한솔 쌤이래. ? 담임? , 담임! 순식간에 동그래진 친구들의 눈에 승관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아직 애네. 애야. 그래, 얘들아. 5년만에 쌤 만나서 좋은 건 알겠는데. , 좀 진정해봐. 나 아직 말 덜 끝났..

 

- 미친, 한솔쌤!!!

 

, 나는 뭐 투명인간이지요. 제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미친 망아지처럼 달려드는 아이들에 승관은 한솔과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다 또 다시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는 한솔에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옆의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 빈 소주잔에 소주를 따랐다. 제가 자작을 하는 모습은 5년만에 만난 선생님을 반기는데 여념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기 얘들아. 나도 5년만에 만난 반장이거든.

 

 

- 근데 쌤.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요?

- 맞아, 애들끼리 말해서 온건데?

- 아, 반장이 같이 오자고 해서.

 

반장? 승관이가요? 승관은 갑자기 자신에게 주목된 시선에 전처럼 눈을 느릿하게 두어번 껌뻑이고는 제 잔에 따르던 소주병을 내려놓았다. , 뭘 봐. 자작하는 사람 처음 봐? 승관의 톡 쏘아붙이는 말투에 아이들은 주변의 눈치를 슬슬 살폈고, 한솔은 비식비식 웃음을 터트렸다. 곧이어 승관과 눈을 마주쳤고, 승관이 과장되게 표정을 구겨보았지만 승관의 표정은 슬그머니 새어나오던 한솔의 웃음에 불을 지피는 도화선이 되었을 뿐이었다. 어느새 크게 터져버린 한솔의 웃음에 아이들이 한솔과 승관을 번갈아 바라보며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보이자 승관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잔을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한솔을 꽤나 날카로운 표정으로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쌤 때문에 수명이 줄어요. 알아? 한솔은 제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여전히 큭큭 웃고있었다. 손으로 웃음을 가릴거면 그 소리도 좀 어떻게 해보던가.

 

- 아, 미안 미안. 사실 말해줄 게 좀 있어서 왔어.

- 말해줄 거요?

- 응, 반장이 말해줄거야.

 

여전히 아이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솔과 승관을 번갈아 바라보았고, 승관은 입술을 오물거려가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그렇다고 보이지까지 않는 건 아니지만- 비속어를 중얼거리며 한솔의 옆에 섰다. 쌤이 제일 나빠요 진짜. , 그 어깨 좀 가만 놔둬요! !

 

한참을 투닥이던 한솔과 승관은 저들에게 주목된 시선을 민규가 알려주고 나서야 자세를 바로하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5년 전처럼.

 

- 그러니까.. 쌤이...

- 결혼한대.

 

, 그래. 결혼. 결혼.. ...결혼?! 쌤 결혼해요?!? 결혼이라는 말을 몇 번 되뇌이던 아이들은 승관의 말이 끝난 후 약 3초정도의 정적을 깨고 주변 10m 내의 사람들을 모두 깨우려는 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승관은 귀를 막고 한 명씩 말하라며 꽥꽥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한솔은 예의 그 어깨를 으쓱이며 승관에게 물어보라며 책임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35명의 아이들 모두의 시선과 질문이 승관에게로 쏟아진 것이다. 알았어. , 말해줄테니까 좀. 좀 조용히. 아니, .. ..!

 

- 다 닥쳐!!!!

 

승관의 화가 잔뜩 섞인 고함에 식당 안이 쥐 죽은 듯이 얼어붙었다. 누군가의 놀란듯한 딸꾹질 소리와 제 분에 못이긴 승관이 씩씩거리는 소리만 제외한다면 완벽한 고요였다. 내가, , 해준다고, 했잖아!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한 음절, 한 음절 뱉어내는 승관의 얼굴색이 제 머리색과 똑같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제서야 자각했다. , 부승관 존나 빡쳤구나.

 

한참을 쏟아진 승관의 잔소리에 아이들과 한솔은 얌전히 손을 모으고 승관의 화가 다 풀리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 그래도 오랜만에 부승관 히스테리 들으니까 예전 생각도 나고 좋지 않.. , 그래 좋지 않구나. 미안. 한참을 꽥꽥 소리 지르던 승관의 화가 끝나고 나서야 조금 정리된 술자리의 분위기에 석민이 능글거리며 아이들에게 꺼낸 말은 꺼내자마자 짜게 식었다. 내가 졸업하고 나서도 부승관 히스테리를 들을 줄이야. 아이들의 원망 섞인 눈초리가 승관을 향하자 계란찜을 조금씩 떠먹던 승관은 차게 식은 눈동자로 욕을 하고있었다. 우리 그냥 술이나 마시자. 응 그래 급우야, 좋은 생각이다.

 

- 근데, 그래서 쌤 누구랑 결혼해요?

- 어? ?

- 네, 쌤이요.

- 어.. 그니까..

 

한 제자의 말에 조금은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한솔은 말을 더듬다 이내 제 옆자리에서 계란찜을 떠 먹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고, 입꼬리를 느릿하게 올려 웃으며 말했다.

 

- 반장이 알려줄거야.

 

한솔의 말에 승관은 계란찜을 떠먹다 말고 목에 무언가 걸린 듯 켁켁거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한솔은 그런 승관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저런, 급하게 먹으면 안돼. 반장.

 

- 아니, 쌤은 왜 다 나한테 떠넘겨요?

- 그게 편하니까.

- 와 진짜 무책임하다.

 

입에 넣던 숟가락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내뱉은 말에 한솔은 헝클어진 승관의 앞머리를 정리해주며 사람 좋은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 또 저 웃음. 내가 저거 제일 약한 거 아니까 저러는거다. 영악해. 맨날 악역은 나한테 맡기죠. 여자애들이 쌤 얼마나 좋아하는 지 알면서.

 

승관은 몇 번째일지도 모르는 한숨을 내뱉으며 제 주머니를 뒤지더니 탁자의 가운데로 말끔한 봉투에 들어있는 종이를 하나 꺼내 던졌다. 니네 다 강제참가야. 라고 말하면서.

 

기회 좋게 종이를 낚아챈 석민은 종이를 낚아채자마자 펼쳐서 크게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 , . 2016525일 성수웨딩홀, 2층 세ㅂ...

- 아 이석민 진짜 쓸모없는 거만 읽어.

 

한껏 짜증을 내며 석민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챈 민규는 크고 빠르게 종이의 내용을 줄줄 읽어가기 시작했다.

 

- 2층 세봉 홀, 신랑 최 한솔. 신부 부 승관. 거참 신부 이름 되게 남자같네요 쌤.

- 그러게, 부승관이래 부승관. 되게 특이하다.

- ...부승관?

- 어, 부승관. ...잠깐만.

 

민규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고, 석민은 고개를 돌려 얌전히 눈을 내리깔곤 막대사탕 하나를 까서 입 안에 넣는 승관을 바라보았다. 주변이 순식간에 가라앉은 듯 조용해지고 적막이 찾아오자 승관은 곱게 닫혀있던 눈꺼풀을 들어올리고는 눈꼬리가 사르르 접히게 웃어보였다.

 

- 나 결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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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틴/솔부 2016. 8. 27. 19:30

- 한솔아, 너는 이번 여름에 어디갈거야?

- 어디 가긴, 학교가야지.

 

아아, 그래. 그렇겠네. 라며 짧게 대답한 승관은 고개를 돌렸다. 제게서 멀어진 시선에 한솔은 멍하니 승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톡 튀어나온 광대가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다. 저와 눈을 마주보다 시선을 피하는, 아니 애초에 저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는 듯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리는 승관에 어느새 익숙해진 것인지. 한솔은 그저 그런 승관의 옆 모습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너는, 학교 안오려고?

 

담임이 가만두지 않을텐데. 중얼이는 제 목소리를 듣기는 들은 것인지 승관은 제 말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평소와 같이 초점 없는 눈으로 저 멀리에서 푸르게 흩어진 구름을 시야에 담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을 뿐.

 

승관은 늘 알 수 없었고, 단조로웠다. 갑자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툭 내뱉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가는 일이 다반수였다. 그럴 때마다 한솔은 지금 승관의 앞에 존재하는 제 자신이 사라지는 느낌에 몸서리쳤다. 아무리 오랫동안 겪여왔어도, 이젠 익숙해졌다 아무리 되뇌여도 절대 적응할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다. 너에게 누구도 되지 못한다는 것은. 물론, 내가 아니더라도 네 앞에서는 무엇이라도 아무것도 되지 못했겠지만. 너는 이미 나에게 네가 되어버렸으니까.

 

- 한솔아.

 

어느새 승관은 초점 없던 눈을 거두고는 한솔을 바라보고 있었다. 깊다. 승관과 눈을 맞출때마다 한솔은 늘 그렇게 생각했다. 참 깊었다. 네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깊은 심야에 발목을 잡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들어와서는 안될 곳으로 막을 수도 없이 새어들어와 제 숨을 턱 막히게 만드는 바닷물처럼, 너는 막을 수도 없이 제 안으로 스며들었고, 내 숨통을 조여왔다. 그러나 그보다 비참한 것은 너에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네게 매달려 네 행동 하나, 네 눈빛 한 번에 이렇게 휘둘리는데. 너는, 너에게 나는, 나는 너에게. 무엇이라도 될 수 있을까.

 

무더운 날씨, 승관의 위로 내려앉은 햇빛이 따갑지도 않은지 승관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었다. 승관의 손목을 타고 녹아 흐르는 단물이 승관의 하얀 피부색으로 물들어 뚝, 뚝하고 떨어져내렸다. 네가 걷는 걸음마다 그림자처럼 희뿌연 아지랑이를 피워내던 검은색 아스팔트가 더욱 짙게 물들어 따라붙었다. 네 입 안에서 녹는 아이스크림보다 흘러내리는 것이 더 많아서. 그러니까 그냥, 아까워서. 네 손목을 느리게 잡아당겨 어느새 네 팔뚝을 따라 흘러가는 단물을 핥아올렸다. 승관은 놀란 듯 눈을 두어번 깜빡이더니 너는 이내 아이처럼 맑게 웃어보였다. 제 손에 들려있는 아이스크림을 내 입 쪽으로 들이밀면서.

 

- 먹을래?

- 줄 생각도 없잖아.

 

어떻게 알았어? 라며 승관은 맑게 웃어보였다. 쓸데없이 먹을 거에 대한 욕심만 많아선, 승관은 꼭 줄 생각도 없으면서 정말 곧 줄 사람처럼 굴었다. 재미없어. 하지마. 몇 번이고 말해보아도 승관은 여전히 입꼬리에 웃음을 대롱대롱 매단 채 어깨를 한 번 으쓱일 뿐이었다. 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허탈한 줄 알아? 턱 끝까지 차올랐던 말을 네게 내뱉으려다 제 숨과 섞어 한숨으로 뱉어내고는 고개를 털어냈다. 이렇게 물으면 너는 분명히. 눈을 크게 뜨고는 내가 잘못한거야? 라고 되물을 것을 알기 때문에.

 

승관의 모든 행동에 악의가 없음은, 그 누구보다 한솔이 더욱 더 잘 알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싶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까. 네가 뱉어내는 물음들은 어떤 비아냥도, 장난도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 네 무의미한 말 한마디에 담금질 당하는 사람이 잘못이지. 승관의 깊은 눈동자만큼이나 승관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몇 년의 짝사랑 끝에 내가 너에게 나의 마음을 고했을 때, 나는 네가 놀라지 않았다는 것에 놀랐고. 그 뒤에 이어진 너의 말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때, 너는 분명히 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했었다. 네가 나에게 늘 보여주는 어린아이같이 맑은 웃음을 보이며.

 

- 나를 좋아하지 말아줘.

 

나는,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 그럼 내가 너를 좋아해볼게.

 

그 날 네 웃음은, 너의 말처럼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만큼 내가 후회하는 날은 없을 거라고.

 

너와 나의 관계는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그저,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고. 전보다 조금 더 위태로워졌을 뿐. 승관은 그 날부터 꼭 한솔과 같이 등교했다. 승관의 아주 가끔, 한 달에 한 두번 제 멋대로 말 없이 사라지던 버릇은 한솔과 교제를 시작하며 문자 한 통을 남기는 것으로 교정되었다. 다른 다정하거나 특별한 말은 아니고.

 

[오늘은 먼저 가.]

 

, 이정도.

 

승관은 어린 소년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제 손끝부터 타고 흐르는 단물로 인해 손가락 사이가 끈적하게 달라붙어도, 한솔이 저의 붉은 입술을, 희뿌연 액체가 제 살결을 타고 흐르는 것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아도, 그저 제 앞의 설탕이면 모두 잊고 맑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네 성격의 단점이라면, 저의 끈적한 시선 뿐 아니라 다른 이의 시선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 화장이라도 한 듯 불그스름한 입술. 아무렇지 않게 제 교복상의를 벗고는 창가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행동들이. 여자가 한 명이라도 섞여있는 공학이었다면, 그냥 특이한 아이로 인식되었겠지만 남자새끼들로 가득 찬 남고에서는 모두의 욕망이 집합된 집합체가 되었다. 좆같게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네가 상의를 벗을 때마다 네 어깨에 둘러주는 저의 체육복을 걷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비록 눈을 두어번 깜빡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는 하였지만, 잔뜩 찌푸려진 제 미간에 너는 겁먹은 듯 나를 보곤 무어라 작게 중얼거리며 다시 고개를 돌려 구름이 섞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것은. 두려움, 그리고 다른 것은 어느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열심히 남아있는 아이스크림을 입 안에 머금었다. 공허한 시선. 더 이상 네 걸음들이 물들만큼 무덥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너와 같이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느릿하게 떼어지는 발걸음, 네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보이는 네 속눈썹이 마치 카메라로 확대 한 것만 같이 선명해서, 매사에 여유로운. 아니, 무관심한 너의 태도가 네 주변의 시간을 잡아먹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네 곁에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동시에 그 감정을 부정했다. 부정한다고 부정할 수 있는 거였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 한솔아.

 

언제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것인지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혀를 내어 한 번 핥아내고는 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살짝 열렸다 닫히는 붉은 입술. 네 혀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다 입술이 닫히자 너와 시선을 마주했다. 느릿하게 휘어지는 너의 눈꼬리가, 네게 닿을 때마다 차갑게 식어가는 제 몸이.

 

- 내일은 나 기다리지 않아도 돼.

 

완전히

 

- 아마, 모레도.

 

가라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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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틴/솔부 2016. 7. 28. 00:32

그로부터 3일 후,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기계음을 내며 쏟아지는 서늘한 바람도, 동네 교회 목사님의 주기도문처럼 나른한 방학 선언식도, 네가 없으니 목 뒷 줄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지루했다. 그냥 에어컨의 바람이 너무 강했던 것 같다. 나는 네 말이 명령이라도 되는 듯 네가 말한 날로부터 내일, 그리고 모레를 홀로 등교했다. 주인의 말을 듣는 잘 훈련된 개새끼처럼.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아니, 몇 주가 지났다. 너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가도 사라진 적이 없는 것처럼 곧 돌아와 나를 기다렸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믿었다. 늘 그랬듯이,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뜨거운 태양빛 아래, 벽에 기대어서는 더운 듯 표정을 한껏 찌푸리고 내게 당당히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며 내게 손을 내밀 거니까. 나는 멍청하게 너를 기다렸다. 네가 약속했던 날짜가 지나고, 몇 주가 더 지나 방학의 끝이 다가오도록 너는커녕, 너의 그림자조차 만나지 못했을 때도 나는 너를 믿고있었다.

 

네가 없어지고부터 시작된 덥다 못해 뜨거운 여름은 지독하게, 없어지지도 않고 한솔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얇은 하얀색 교복이 투명해질 정도로 뚝뚝 팔뚝을 따라 흐르는 땀은 말라버리지도 않고 끝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옆에서 헥헥거리며 땀과 함께 끈적한 단물을 흘려대는 승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다행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야, 최한솔

- 왜.

- 담임이 너 불러.

 

천장에서부터 쏟아지는 차가운 바람이 마치 생명의 숨결이라도 되는 듯 교실 문을 열자마자 양 팔을 활짝 벌리고 바람을 맞던 석민은 주위를 둘러보다 나를 보자마자 꽤나 다급한 손짓을 보였다. 무슨 일인데? 몰라. 그냥 빡돈 거 같던데. 너 뭐 했냐? 몰라 시발. 땀이 다 식기도 전에 열기로 가득한 복도로 내몰린 한솔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한솔아, 승관이 어디있는지 아니?

- ...? 승관이요?

 

한솔은 꽤나 다정한 담임 선생님의 말투와 표정에 놀란 듯 눈을 껌뻑이다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 담임 빡돌았다며. 역시 석민의 말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생각을 하며 저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을 가만히 마주쳤다.

 

어른들은 다 저런 눈을 가지고 있었다. 깊은 듯 얕은 눈동자. 너무 깊어 하염없이 빠져들다가도 자각하고 나면 발목, 아니 발등도 채우지 못하고 철퍽거리는 것이 어른들이었다. 어지럽고. 복잡하다. 부승관처럼.

 

죄책감, 불안감. 가슴속을 휘젓다 못해 튀어나온 다른 이의 감정. 부승관이 무슨 사고라도 쳤나. 그렇지만 사고를 쳤다기에는 선생님의 눈동자 속에서 유영하는 감정들이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담임 성격에 분명, 사고를 쳤으면 여기 있는 책상 하나라도 엎었겠지. 그것도 아닌데 담임 표정이 왜 저래. 담임 선생님은 한솔이 뭐라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 듯 꽤 간절한 표정으로 한솔과 눈을 마주쳤다. 그런 눈길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쌤이 그런 눈빛으로 봐도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 무슨 일 있대요?

-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나의 태도에 선생님은 고개와 손을 두어번 젓고는 내 손에 작은 딸기맛 쿠키 하나를 쥐어주었다. 뭐야 진짜, 이 쌤이 오늘 왜 이래. 뭐 잘못 드셨냐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필터 없이 그대로 뱉어냈다가는 쿠키를 빼앗기는 걸로 모자라 아침자습시간 내내 벌을 서게 될 것 같아 아랫입술을 꼭 이로 다물었다.

 

네가 없는 시간은 참 빠르게도 지나갔다. 네가 유일하게 집중해서 수업을 들었던 문학도, 그렇다고 성적이 잘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네가 끔찍이 싫어했던 수학도, 네 모자란 수면을 도와주었던 영어도. 네가 없으니 빠르게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너와 내 사이를 떠내려간 시간이 너와 나 사이에 깊은 골짜기 하나를 만들어 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이 너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내가 알고 있는 것. 다른 것이 없었다.

 

나는 네가 어디있는지 모른다.

나는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너와 나는,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조금만 더울 때마다 찾던,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아이스크림은 잘 챙겨먹었는지, 여름을 못견디게 싫어하던 네가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어디선가 녹아버리지는 않았을지. 까만 아스팔트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뭉게뭉게 떠오르는 잡념에 머리를 잠식당한다. 곧 이어 그 사이를 가르며 피어올라 머릿속을 물들이는 가는 실.

 

보고싶다.

 

 

 

 

네게 말을 하지 않고 너의 집에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비록 네 집 안에 들어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네가 가끔, 늦잠을 잘 때에 나는 이 자리에 서서 굳게 닫힌 철문을 몇 번이고 두드렸었다. 부승관, 학교 가자. 일어나. 철문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적막, 때가 타 옅은 회색이 된 운동화로 문을 두어번 차고나면 너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창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미안. 이라며 아직까지 깊은 잠에 잠긴 목소리를 내뱉고.

 

철문은 평소와 같이 굳게 닫혀있었다. 혹시 창문이 열려있을까 싶어 바라본 창은 굳게 닫혀있을 뿐 아니라 커튼이 내려와 시야를 차단하고 있었다. 더위도 많이 타는 애가. 창문 좀 열어놓고 자지. 괜한 아쉬움에 머리를 두어번 긁적이고는 몸 속에 가득찬 열기를 숨과 함께 뱉어냈다.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담배연기 같은 희뿌연 숨. 손은 곱게 말려 두려움을 모른 채 철문을 두드리고 목소리는 더 이상 차오를 곳이 없어 토해내듯 뱉어진다.

 

- 부승관.

- 나 왔어.

 

아파트 복도를 메아리처럼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는 원래 없었던 것 마냥 사라진다. 고요히 내려앉은 적막.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정적에 팔뚝의 털이 삐죽 선다. 제 팔뚝을 한 번 쓸어내린 한솔이 무언가의 신호라도 되는 양 발로 문을 두어번 찼다. 이제 너의 차례였다.

 

- ...

 

따가운 여름 날의 햇살처럼 적막이 내려앉는다.

 

- 승관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시끄러운 매미울음 소리.

 

- ...

 

위험신호를 알리는 사이렌 마냥 점점 커지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제게 경고를 울리는 것만 같다.

 

- 기다릴게.

 

다른 이의 고막을 울리지 않고 공기 중에 흩어져버리는 제 음성이 가엾기만 하다.

 

결국, 한솔은 올라왔던 발걸음을 그대로 돌려 내려왔다. 자꾸만 귀 끝에 승관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남아있는 듯 했지만 매미가 그것을 감추려는 듯 시끄럽게 울어제껴 한솔은 더운 숨을 내쉰 채 그로부터 등을 돌려야 했다그래, 그래도 괜찮아. 나는 너를 기다릴테니까. 마지막으로 네 집 앞에서 뱉어냈던 말을 여러번 입 안에서 곱씹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길게 늘어진 한솔의 그림자는 짙은 발자국을 남기고 그에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늘어지게 따라붙었다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니, 너는 집에 있지 않았겠지.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관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라는 예감이. 아니, 확신이 들었다. 한솔의 근거없는 자신감이었다.

 

잘게 부서진 딸기맛 쿠키 하나만이 승관의 집 앞에 놓여 매미의 울음소리를 온전히 듣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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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연기하려고 배우 됐습니다.
- 한솔아.
- 좆질하려고 배우 된 거 아니라고요.
- 최한솔.

이가 바득바득 갈린다. 조연으로라도 출연하던 영화에서는 단 며칠만에 그대로 사망씬을 찍게 됐고, 제 커리어를 길러주겠다던 회사는 제 커리어에 검은 물감을 덧칠하라 권하고 있었다. 연기하게 해줄게. 그러니까 한 번만, 딱 한 번만 눈 감고 다녀오면 된다니까? 한솔아, 형 입에 풀칠 좀 하게 해줘라. 작은 회사, 가족과 다름없이 지낸 회사 식구들이었다. 대표님은 제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제 손을 잡고는 저에게 타이르듯 빌고 있었고, 승철이 형은 난처한 표정으로 저와 대표님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저절로 한숨이 밀려나와 후더운 공기에 섞여든다. 한 여름임에도 에어컨을 틀지 못해 물기가 가득한 방 안.

그래도 대표님, 못하는 건 못하는 거예요. 잡혔던 손을 한 번에 뿌리쳤다. 제 손톱모양대로 붉게 달아오른 손바닥이 울퉁불퉁하게 부어오른다. 회사에 희망은 저 밖에 없다며, 톱배우로 만들어줄테니 나중에 한우나 쏘라던 회사 식구들의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려 눈을 질끈 감고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며 뒤를 돌았다. 괜한 죄책감에 형, 미안해요. 라는 생각을 한 번하고 눈을 뜬 순간.

- 한솔 씨.

아, 씨발.
좆같은 부승관.

*

한솔은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입술에 대고 있었다. 승철이 그런 한솔을 본다면 기겁을 하고 제 손에서 컵을 떼어놀 것이 분명 했지만 한솔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영화도 짤렸는데 뭘. 지금은 혀가 데여서 발음이 꼬이니, 입술이 부르터서 안예쁘니. 그런 것보다는 자신의 앞에서 입가에 크림을 잔뜩 묻히고는 생크림이 듬뿍 묻혀진 케이크를 떠먹고 있는 부승관을 더 신경써야 했다. 자기랑 자기 싫다고 회사에서 그 지랄을 떨고 온 사람을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여기까지 데려온 건지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한참동안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왜인지 나만 그렇게 느낀 것 같았지만. 승관이 입술에 묻은 몽글몽글한 생크림을 혀로 다 훑어 먹고 남겨두었던 딸기까지 입 안에 밀어넣자 한솔은 어느새 비어버린 머그잔을 내려놓고 승관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 저기요, 부승관씨.
- 네, 한솔씨.
- 저는 그 쪽 스폰 받을 생각 없거든요.

부승관의 붉은 입술 사이로 아, 하고 짧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느릿하고 붉은 숨. 내가 가장 싫어하던 숨이 공중으로 흩어져나와 호흡기를 통해 제 안으로 섞여 들어온다. 곧 이어 부승관은 눈꼬리를 곱게 휘어접으며 웃었다. 그리고는 이어져 나온 말에 한솔은 예의 그 매서운 표정을 그만두고 얼빠진 표정으로 승관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 저도 한솔 씨 스폰 대줄 생각 없는데요?

저건 또 무슨 개소리야. 좆질 몇 번 하면 스폰을 대주겠다고 회사로 컨텍을 넣을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발뺌을 하는 꼴이 웃겨 얼빠진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웃긴지 부승관은 나른한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 호텔 엘레베이터에서 마주쳤던 그 웃음. 다른 남자에게 향하던 시선이 제게로 향하니 그 때 구미호에게 간을 뻇긴 사내처럼 멍청하게 웃던 남자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았다. 응, 씨발 인정하기 싫은데. 웃는 꼴이 존나 예쁘긴 하다.

- 저, 스폰 대준 적 한 번도 없어요.
- 예?
- 몰랐구나, 한솔 씨.

예, 전혀 몰랐네요. 그럼 제가 호텔에서 마주친 그 수많은 남성들은 모두 사촌에 팔촌이라도 되십니까? 턱끝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삼켜내고는 작위적은 웃음을 지어냈다. 비지니스, 비지니스하자 한솔아. 저를 타이르듯 몇 번을 되뇌이고는 입꼬리를 간신히 올렸다. 저쪽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몰라도- 아이같은 웃음을 흘리면서 몽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계속 노려보고 있기에는 좀, 그래서.

- 나랑, 연애해요.

이건 또 무슨 신박한 헛소린가 싶어서 눈을 마주보니 함정을 설치해놓고 누군가 걸리기를 기다리며 방긋방긋 웃고있는 소년같은 웃음이 부승관의 입꼬리에 걸린다. 아, 아무래도 함정인 거 같은데.

- 나 원래 아무나랑 섹스 안하거든.

그 이후로는 몽롱한 꿈처럼 모든게 진행됐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제게 다가오라는 듯 까딱였고, 저는 무언가에 홀린 듯 다가갔다. 귓가에서는 부승관의 나른한 목소리가 울려퍼졌고 -무슨 내용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부승관이 내민 손을 잡고 두어번 흔들었던 것도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형, 아니 대표님과 승철이 형의 어깨에 내 팔이 올라갔고, 그 둘의 함박웃음 사이에서 붕붕 휘둘려다녔던 거 같다. 아니, 친동생같은 배우가 스폰 뛰러 간다는게 그렇게 좋아? 제 톡 쏘아붙이는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하하호호 웃는 회사 식구들의 웃음에 두손 두 발이 다 들렸다. 좋은가보네. 그것도 존나. 

그 틈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한껏 쓰다듬 당하느라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는데 또 어디서 사온건지 초콜릿 라떼를 한 손에 들고는 사무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부승관과 눈이 마주친다. 부승관은 곧 이어 나를 향해 눈부신 햇살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붉은 입술을 몇 번 오물거렸다. 오늘, 끝나고 봐요. 소리 없이 전해진 음성, 자신의 입술만큼 붉은 머리칼이 열린 문사이로 흐른 바람에 의해 휘날리고 부승관이 자취를 감추자 문이 닫힌다. 멍하니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자 코끝에 맺히는 향수냄새.

아, 아무래도 제대로 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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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샨필모 2016. 4. 17. 00:37

1.


한석율이 죽었다. 늘 있던 일이었다. 교통체증과 자잘한 마찰들, 가끔 그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불행한 사고들. 내가 아니었지만 늘 주위에 있었다. 이번엔 불행히도 한석율이 그 사고에 휘말렸을 뿐이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덤덤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네가 죽었다는 것은 내겐 여전히 꿈같은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네 죽음에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았고 너는 불타 없어졌다.



2.


밝게 웃고 있는 네 사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얀 꽃에 둘러 쌓인 네 모습이 어색해 나는 널 따라 웃을 수 없었다. 팔을 접고 네 사진 앞에 몸을 숙였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거친 소재의 상복이 제 몸을 쓸어 피부를 따갑게 할퀴었다. 나는 네게 절을 하는 내내 나는 벌을 받는 기분을 느꼈다.



3.


네 사진의 옆으로 물러나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네 장례식장은 복잡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경유했다. 너의 어머니, 아버지, 여러 형제들과 사촌들 그리고 나에게도 익숙한 얼굴들. 그들은 상복을 입고 한석율의 사진 옆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놀라더니 이내 내 등을 토닥였다. 그래, 각별한 동기 사이였지- 라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거라고 나를 위로하는 그들에 비릿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너와 나는 ‘각별한 동기’ 정도로 정의되는 관계였던가. 네가 없으니 너와 내가 그냥 동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나 밖에 없었다. 나만이 아는 너와 내가 연인이었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받을 수 없었고 모두가 알던 너와 내가 동기였다는 것은 사실이 되었다. 네가 없이는 내가 너와 사랑했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었다. 네가 없으니, 네가 나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내 스스로 기억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런 관계로 기억된 채 끝이 났다. 꿈같던 네 장례식이 끝나고 제 온몸을 따갑게 긁어대던 상복을 벗으면서도 이 모든 일이 꿈같았다. 당장이라도 네가 나에게 밝게 웃으며 달려와 안아줄 것 같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4.


오랜만에 한석율의 집에 들렸다. 회사에 더 가까우니까, 친한 동기니까. 라는 이유 등으로 시작했던 너와 나의 동거생활은 분명 순탄하였지만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일년, 일년이란 시간 사이 난 네 의지도, 나의 의지도 누구의 의지도 아니었지만 너와의 동거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5.


우리는 그런 관계였다.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는 나를 사랑했고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남길 수 없었다. 그래서 늘 너와 나는 무언가에 가로막혀 우리가 될 수 없었다. 둘 중 한 명이 그 관계를 부정해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관계. 그저, 너와 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6.


집은 변한 것이 없었다. 한석율과 내가 마지막으로 나왔던 그 모습 그대로 여기저기 널브러진 한석율의 양말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양말은 벗어서 빨래통에 넣어놓으라니까... 나는 이곳저곳 휘날려있는 양말과 그의 옷가지들을 주워 빨래통에 넣고 오랜시간이 지나 딱딱하게 마른 쌀알이 붙은 그릇을 거품으로 닦아냈다. 집 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자 제 손길이 닿은 곳에 조금씩 생기가 돋는 듯 해 나름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공허한 집 안을 둘러보았다.



7.


어느새 해는 수평선 뒤로 넘어가 주위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아직 전등을 킬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굳게 닫혀있던 방 안의 문을 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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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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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입사 후 어느 순간부터 한석율은 끊임없이 내 발을 걸어왔다. 너무 뻔하게 다가오는 그의 발을 한심하다는 듯 식은 눈으로 바라보며 짓밟거나 무시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가끔은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한석율의 애정 공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 그에게 걸려 완전히 넘어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런 그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더 저 자신을 방어했다. 한석율의 장난스러운 놀음에 넘어가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한석율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나를 넘어트리려 다가왔다.


“ 그래그래 장그래~ ”

“ 이름으로 장난치지 마시라고요. ”

“ 에이, 아침부터 왜 이렇게 까칠하실까? 응? ”


생글생글 웃으며 제 어깨를 감싸 쥐고 말을 거는 한석율은 위험했다. 보통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매우 매우 위험했다. 귓가에 느껴지는 그의 숨과 피부에 닿아 연하게 느껴지는 그의 빠른 박동이 마치 제 심장 소리 같아서 그로 인해 심장이 두근거린다. 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에 나는 한석율의 손을 잡아 빙글 돌며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됐어, 완벽해. 오늘도 넘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한석율이 나를 위협해 와도 나는 막아냈고, 넘어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해 나간다면 나는 평생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뒤로 들려오는 한석율의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 자리로 걸어왔다. 오늘도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요즈음의 영업 3팀은 바빴다. 서로 알 수 없는 일들에 치여 제대로 된 대화도 할 수 없었고 커피와 함께하는 잠시의 휴식은커녕 화장실에 가는 시간도 줄여가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서류들을 처리했다. 일은 파도처럼 밀려와 내 몸과 정신을 온전치 못하게 했다. 눈앞이 핑 글 돌아 어지러운 느낌에 의자에 기대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눈앞엔 컬이 들어가 빵실거리는 앞머리를 가진 한석율이 파티션에 기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비도 오는데, 술 한잔할까? ”


뻔한 대사와 뻔한 눈빛이었다. 지속된 한석율의 공격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나는 이 정도의 공격엔 무뎌져 흔들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 바쁩니다. ”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리던 한석율은 다시 한껏 밝아진 표정으로 과장님께 인사를 하더니 내 귀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가며 능청스럽게 나를 빼돌렸다. 너는 순식간에 지나간 일들에 놀라 멍하니 너를 바라보는 나를 보며 찡긋 윙크하더니 이상한 제스쳐를 취하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내 시야에서 멀어졌다. 아, 한석율은 정말 위험한 사람이었다. 내 완벽한 방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공격해 내 방어막을 천천히 조각내왔다.


우중충한 날씨에 하늘에선 비가 추적추적 내려와 도로를 적셨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날이었다. 제 옆에 선 한석율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우산 하나를 펼쳐 제 어깨를 감싸 쥐었다. 나는 한석율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이제 이 정도의 공격엔 넘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이젠 별것도 아니네. 스스로 그런 말들을 하며 위안으로 삼았다. 쿵쿵거리는 박동이 네 손목에서 전해져오는 것인지 제 심장에서 전해져 오는 것인지는 주변의 빗소리에 묻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한석율에게서 전해지는 것일 거로 생각하며 나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한 우산 속에서 전해지는 네 온기는 위험수위가 높았다.


망했다. 완전히 망했다.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갈수록 한석율은 흐릿한 인영이 되었다. 가까이 붙어 귓속에 소곤거리는 한석율의 음성은 굉장히 위험했다. 이미 위험수치를 넘고도 한참이나 넘어버렸다. 심지어 제 목소리는 이미 늘어져 꼬이기 시작했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볼과 걱정스러운 듯 제 볼을 어루만지는 한석율의 시원한 손에 심장이 두근거릴 것만 같았다. 안 되겠다. 일어나자 그래야. 라며 저를 일으켜 끌어안고 나갈 땐 심장이 제게도 느껴질 만큼 쿵쿵 소리를 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부정맥인가? 머릿속에 스치는 위험한 상상을 외면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한석율의 품에 기댔다. 한석율의 품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고개를 파득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한석율의 따뜻한 공격은 너무나도 매서워 방어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 장그래, 춥지. ”

“ 아닙니다아…. 하나도 안 춥습니다-! ”

“ 추운 것 같은데? 손이 차가워. ”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내 머리를 넘겨주는 한석율에 나는 곧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제 손가락은 이미 한석율의 손에 맞닿아 있었고 심장은 쿵쿵 뛰어 심지어는 아프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무너지는 걸까. 내가 그동안 어떻게 버텨왔는데…. 이대로 넘어질 수는 없다고 다짐하며 마음을 굳게 먹고 너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 저, 저 혼자 갈 수 있습니…. ”

“ 이렇게 하면 안 춥지? ”


한석율이 나보다 빨랐다. 부드럽게 내 손을 감싸 제 코트 속으로 집어넣고 저를 꼭 끌어안는 한석율 덕분에 바로 마주하게 된 한석율의 얼굴은 나 자신만을 담고 있었다. 부드럽게 접힌 눈꼬리와 깊이 패인 보조개가 아름다울 지경이었다. 아아, 치명타였다. 나는 그에게 완전히 패배했다. 한석율의 공격에 내 방패는 깨지고 말았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 결국 제 안의 모든 것을 담아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 저기, 한석율 씨…. ”


결국, 나는 그에게 완전히 넘어졌다.




W. @nunbenim

‘낯선글’ 의 발간을 축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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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esertflowerjg.tistory.com/7
























時의 부재




눈비 








하고 둔탁한 소음이 거리에 울려 퍼지더니 이내 아찔하게 올라오는 비릿한 혈액의 아릿함이 콧속을 바늘로 찌르듯 스며들어와 뇌를 잠식한다시끄럽게 울리는 여러 이들의 비명소리와 점점 가까워지는 구급차의 날카로운 붉은 빛이 섞여 머리를 어지럽게 휩쓸었다사인은 추락사오랫동안 보수를 하지 않아 녹슬어 삐걱거리던 울타리는 아주 가녀린 그의 무게조차 버티지 못하고 결국 쓰러져 버렸다그와 함께 바람에 힘없이 떨어지는 단풍처럼 흘러내리는 그의 몸은 둔탁한 파열음을 내며 청명한 가을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이로써 장그래는 5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비참하고 가혹한 시련이었다그렇지만 어떤 세기의 고통이던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면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었다처음 그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눌리고 찢겨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 내 자신을 자책하고 원망하며 죽음의 여진에 흔들렸다그리고 불과 그의 다섯 번째 죽음 앞에서 나는 더 이상 감정의 흔들림을 느끼지 못하고 완전히 조각 조각 나뉘어진 그의 몸체를 동요없이 바라보았다그저 머릿속에는 다시 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환한 햇빛을 탁하게 여과시켜 비추는 바다 위에 머무르는 돛단배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항상 너의 죽음그 후에 내뱉던 힘없는 말 한마디를 내가 얼마나 반복해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그렇게 너는 한 번두 번다섯 번수십 번을 내 눈 앞에서 죽었다.

 

*

 

창문을 모두 가렸다고 생각한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어와 차갑게 식어가는 내 방그 중간에서 함께 서늘하게 얼어붙는 내 몸을 녹였다차라리 그냥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걸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모래알 같은 햇살에 약간의 피로감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이불을 걷어내자 온몸을 감싸는 한기에 조금 몸을 떨다 어둠으로 잠식된 방의 유일한 출구인 창문을 막고 있던 커튼을 올리자 이내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이 투명한 유리창을 가뿐히 제치고 들어와 얼어붙은 것처럼 서늘하던 내 방 안을 천천히 녹여갔다가늘게 뜬 눈 사이로 빛이 배여 빛이라는 추상적 물질에 몸의 감각이 익숙해 질 때 즈음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3, 2, 1. 지잉-

 

어느 때와 다름없는 25일의 아침이었다커튼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뜨고 잠자리를 정리한 후 커튼을 열고 3초 후에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수십 번이고 열어본 휴대폰 안에는 역시 25일에 네가 보내왔던 그 문자 한 통일 것이다반복되는 그 날의 기억에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금요일 오전의 햇살보다 더 환한 인공의 빛을 쏟아내는 휴대폰 액정을 응시했다.

 

「 12월 25일 금요일 10시 10

발신인 장그래

정구씨오늘 만나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몇 번이고 반복되어 내게 보여지는 같은 시각같은 내용의 메시지 한 통네가 보낸 그 단순한 한 문장은 너에게는 보통의 날들과 같은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지만나에게는 수 없이 반복되는 치열한 오늘과의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종소리와 다름없었다분명 조금 큰 사이즈의 목둘레가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3시간 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불안감과 매번 내게 찾아왔던 그 불행들이 자신을 스쳐 지나갈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희망감들이 굵고 거친 동아줄이 되어 내 목을 서서히 조여오는 듯한 갑갑함에 그를 털어내려는 듯 물기없는 손과 얼굴을 비벼 마른세수를 하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끄러운 타일이 깔린 작은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몸에 먼지처럼 옮겨붙는 따스한 햇빛들을 툭툭 털어내며 걸음을 재촉했다햇살이 따스하다고는 하지만 겨울은 겨울이었다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귀를 배어갈 듯 매섭게 불어왔다. 12월 25겨울의 첫 자락을 타고 들어온 냉한 공기들이 한데 모여 어우러져 주변을 자신들이 가진 냉기로 꽁꽁 얼려버리는 그런 겨울의 중간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다 함께 따스한 집이 아닌 거리로 나온 것은 오늘이 다른 날이 아니라 12월 25일이기 때문일 것이다오늘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관대했다평소에는 추위가 찾아오면 몸을 떨던 사람들은 오늘이기 때문에 추위에 관대했고 또 추위를 축복했다평소라면 천대받았을 하얗고 커다란 눈송이들이 도로에길에 소복소복 쌓이는 것도 오늘이기 때문에 모두 축복했다오늘이 다른 날이 아니라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다른 이들은 관대했고 또 부주의했다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담기지 않는 그저 예수의 탄생일인 하루를 전 세계의 모든 이들은 축복하고 기뻐하며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보냈다사실그들에게는 그 날이 예수든부처든어느 누구의 탄생일이든지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그들에게 그러했듯 나에게도 그랬다건조하게 말라 비틀어진 나를 비추는 한 줄기의 햇살같은 그와 그저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에그렇기 때문에 12월 25일이 되기 전 나는 너에게 만나자는 말을 내뱉었겠지너에게 크리스마스에 만나자는 이야기를 무사히 끝내고 승락까지 받아낸 것은 쾌재였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처음으로 낸 그 용기 덕분에 장그래는 나와 함께 무한의 굴레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죽음죽음이란 것이 무엇일까시간이라는 것은 또 무엇일까신이라는 것은다른 이들이 그리도 울부짖는 그 신이라는 것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존재한다면 왜 너와 나를 이리도 절망적인 시간의 미로속에 빠트리는 것인지이를 이겨내면 우리에겐 무엇이 남는 것인지아니이겨낼 수는 있는 것일까잡념이 이리저리 뒤엉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이겨낼 수 있다장그래와 박정구너와 나는 이 좆같은 2015년 12월 25일을 벗어나 함께 살아있는 채로 26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되뇌이고 또 빌었다그렇게 계속 내 자신을 타이르듯 말하고 나면 그게 사실이 되는 것 같아서하지만 분명 작은 눈덩이 같았던 불안은 눈이 소복히 쌓인 눈밭에 굴려 만든 눈사람처럼 계속 불어나 결국 내 머릿속의 중앙에 들어차 그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결국 칠흑같은 불안이 내 몸을 까마득히 깊은 바닥으로 끌어내렸다내 눈 앞에 흐릿하게 보이는 네 인영이 실제하는 것인지어지럽혀진 머릿속에 떠도는 허상인지 알 수 없어 조금씩 일렁이는 어둠을 가만히 바라보자 점점 선명하게 가까워지는 네 인영이 톡톡 뛰어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정구씨! "

 

그와 함께 옅은 붉은색의 햇빛이 해사하게 웃는 너의 얼굴을 비추었고 네 그 모습이 선명하게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큰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불안이 너라는 햇빛에 의해 모두 녹아내리는 것 같아 나는 그저 밝게 웃는 네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않고 차갑게 식은 너의 손을 붙잡았다그와 함께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란 근거없는 희망이 몸 속 깊은 곳에서 부터 타올랐다.

붙잡은 네 손에서 따스한 생기가 번져 천천히 머리끝까지 네 생기로 물드는 것 같아 근거없던 희망이 확신으로 바뀔 때 즈음너무나도 맑고 투명하지만 유리처럼 유약한 희망은 내 손안에서 산산조각나 바스라졌다한겨울소복히 쌓인 눈에 의해 반사되는 햇빛처럼 화사하고 하얀 미소를 머금고 내 이름을 다정히 부르던 장그래는 지긋지긋한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조각조각나 흩날렸다공사중인 건물 위에서부터 들려오는 비키라는 날카로운 외침에 너를 끌어당길 새도 없이 들어닥친 여러 쇳덩이의 불행들은 정확히 너에게 떨어져 네 몸을 꽤뚫었고 너는 그 순간에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무거운 쇳덩이에 짓이겨 부서졌다그의 몸이 쓰러져 회색의 보도블럭들을 붉은색으로 물들이자 주변에서는 잠시의 정적이 맴돌았다충격적인 장면일 수록 인지하는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듯 했다감각뉴런,척수를 타고 올라가 대뇌를 울리기 까지 잠시의 정적이 끝나자 주변에서는 완전히 깨져 날카롭게 주변을 베어나가는 유리조각처럼 서리한 비명들이 터져나왔다이번에는이번에는 그 가혹한 운명이 우리를 피해가길 바랬는데그리 간절하게 기도했는데잠시 품었던 희망을 비웃듯이 잘근잘근 짓밟고 너를 스쳐 지나가는 죽음이라는 불행은 새싹같은 희망이 조금 살아날 때만 다가와 그를 완전히 꺾고 지나갔다품을 때마다 짓밟히는 희망을 알면서도 그의 미소 한 번에 제 뇌리 속 깊은 곳에 심기는 희망이라는 씨앗들이 지긋지긋할 만큼 이제는 익숙해진 너의 죽음과 그의 반응들에 나는 검붉은 피로 덕지덕지 뒤덮여 눈을 채 감지도 못하고 자신의 모든 생기를 잃은 너를 가만히 바라보다 주변의 시선이 모두 너에게 달라붙기 전 또 다시 살릴 수 없는 너를 살리기 위해 한마디를 내뱉었다.

 

다시 "

 

*

 

눈을 뜨자 또 다시 커튼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어두운 방안을 비추었다익숙한 온도익숙한 공간익숙한 풍경또 다시 오늘이었다차라리 그냥 이대로 죽어버렸다면 좋았을 걸이제는 몇 번째인지도 셀 수 없을만큼 겪어온 오늘이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오늘따라 소름끼치도록 서늘한 오늘이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아 괜히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었다내 손으로 그의 죽음을 수백번 반복해놓고서 이제와서이제와서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걸까웃기지도 않았다그의 죽음에 슬픔을 느꼈다면그의 죽음을 받아들였어야 했다하지만 결국 나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간을 되돌렸기 때문에그의 죽음을 반복했기 때문에나는 슬퍼할 자격이 없었다내 손으로 시작했으니 내 손으로 끝낼 때까지 나는 슬퍼해서는 안된다복잡하게 엉켜드는 사념들에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린 손을 들어 내 시야를 가리고 내 자신을 세뇌시키듯 중얼거렸다.

 

그에게 내일이 찾아올 때까지. "

 

죽음의 그림자가 완전히 그를 비켜나갈 때까지그에게 내일이 올 때까지내일의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 틈새로 새어들어와 그의 잠을 깨울 때까지여러번 되뇌이고 마른세수를 하며 비교적 포근하던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지금까지 겪어온 오늘과 같이 커튼을 열고 조금 따갑다고 느껴질 만큼 뜨거운 빛을 맞이했다따스한 햇빛이 차갑기 굳었던 몸을 타고 올라와 서서히 번져갔다빛을 받아 더욱 반짝이며 빛나는 먼지들의 축제가 발 끝에서부터 열리고 있었다천천히 물들듯이 올라오는 간지러운 느낌에 발을 살짝 움직이며 가림없이 붉은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냈다사실 수백 번 시간을 돌려보아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었다처음 네가 내 옆에서 걷다 발을 헛디뎌 도로로 떨어지고 동시에 빠른 속도로 지나가던 차량에 몸을 부딫혔을 때도그 날따라 불완전한 정신으로 떨고있던 지독한 우울증을 앓고있던 한 사내가 내 옆에서 화사하게 웃던 너를 찔렀을 때도모두가 들떴던 하얀 눈이 소복히 쌓였던 그 날그 날따라 신발이 미끄러워 나보다 앞서 걷던 네가 불행히도 계단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부딫힌 머릿조각들이 이리저리로 날렸을 때도혹시나 만나지 않으면 너를 둘러싼 운명이 비켜나갈까 싶어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 머무르게 했을 때도 그를 비웃듯이 너의 집에 화재가 나 후에 내 손에 너라고 추정되는 잿더미가 들어왔을 때도조금 높은 건물의 옥상 허술한 울타리가 녹슬어 너의 몸뚱아리와 함께 떨어졌을 때도그 후 추락사폭발화재타살익사감전 그리고 자살까지도너는 그 수많은 죽음의 예시들을 겪어내며 수 십번 수 백번을 내 앞에서 죽었다그럼에도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를 내 애원에 다시 라는 말과 함께 너는 12월 25일의 장그래그로 돌아왔다처음 너의 죽음을 겪고 네가 살아났을 때에는 너를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았다네가 죽어도 시간을 돌리면 그만다시다시다시다시그렇게 수 십번나는 어느새 네 죽음에 무뎌져있었다나는 내가 무뎌진만큼 너 또한 고통에 무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렇기에 나는 내 욕망에 충실할 수 있었다따스한 햇살에 몸이 녹으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던 것도 내가 무뎌질만큼 무뎌졌기 때문에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생각을 감히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그에게도 이 따스한 햇살을 선물해주기 위해.

 

*

 

눈 앞이 번쩍이며 여러 빛들이 난잡하게 교차한다화면조정중인 티비처럼 지직거리며 깨지는 시야에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내 몸은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뚝 떨어졌다 다시 눈부시게 하얀 빛속으로 건져지기를 반복하며 어지러이 깜빡였다어느순가 그 틈새로 아릿한 피비린내가 스며들어와 천천히 번지며 귓가에는 따가운 비명과 여러 이름들이 울렸다그 사이로 너의 나직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는 듯 해 나는 지긋이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정구씨. "

 

어딘가 불편한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덤덤한 너의 목소리에 나는 흐릿한 시야를 집중해 말간 너의 얼굴을 천천히 올려다 보았다햇빛이 비치는 투명하다고 생각 될 정도로 하얀 너의 피부그 사이 이질적이게도 그의 턱 주위에 묻은 붉은 피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와 놀라 너의 뺨을 어루만지려 손을 뻗었지만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뻗었던 손은 닿아야 할 곳에 닿지 못하고 이내 힘없이 떨어졌다이유를 알 수 없는 끔찍한 고통에 고개를 내려 내 복부를 바라보자 차의 파편으로 추정되는 물질이 박혀 끈적하고 짙은 검붉은색의 혈액을 꿀럭이며 뱉어내고 있었다발견하기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고통이 모이고 얽혀 파도처럼 내 몸을 덮쳤다너의 얼굴에 튄 혈액이 너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라는 것에 안도감을 느낄 틈도 없이 짙어지는 고통에 불과 몇 분전의 기억들이 밀려들었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길을 걷던 너는 어느 때와 다름없이 다가오는 죽음이란 그림자에 뒤덮였고대낮부터 알콜에 흠뻑 젖은 어떤 차량이 인도 위에 서있는 너를 향해 달려들었다평소와 같다면 너는 죽었을텐데다행인지 불행인지 너는 살아있었다달려오던 차량이 방향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그저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나는 죽음이란 것에 담금질 되어 그에 따른 고통을 안일하게 생각하고 그 운명을 내게로 돌렸다너는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위로 밀쳐졌고나는 다가오는 차량의 경적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다.

검붉은 색의 혈액이 천천히 내 복부를 타고 흘러내려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다손으로 그를 부여잡자 내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끈적한 점성의 액체와 피부를 꽤뚫는 생경한 고통에 몸이 저절로 떨렸다하물며 종이에 스쳐 베이기만 해도 느껴지는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는데 그런 작은 상처에도 몸을 떨면서 죽음과 가까워지는 일들에 따라오는 고통은 무뎌진다고 무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나로 인해 이 고통을 수 십번 반복했던 너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이 눈물을 만들어 툭 떨어트렸다장그래너를 놓지 못해 시간을 거슬러 붙잡아 놓은 벌이 내게로 돌아오는 걸까아프다이 아픔을 너는 몇 번이나 느꼈을까점점 흐릿해져 오는 시야가 점점 내 목을 졸라오며 끝을 알리는 것 같아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그래도 이제 너는 12월 26내일의 햇살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함께 할 수는 없지만 너라도 내일을 보낼 수 있다는 것에 희미하게 미소지었다시야를 가리며 하얗게 올라오는 아지랑이들 사이로 슬픔에 잠긴 네 얼굴이 보였다마지막 힘을 짜내 내게로 손을 뻗자 너는 슬픈 표정으로 물끄러미 내 손을 바라보더니 무덤덤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다시 "

 

 

 

「 12월 25일 금요일 10시 10분 

 

다시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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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2016. 1. 11. 00:03
처음부터 내가 그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밝은, 능글맞은 또는.. 가벼움? 모든 이에게 다름없이 농을 건내고 빙긋 웃어보이며 그들을, 나를 품에 안는 그는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그저 같은 가의 사내일 뿐 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더 편히 대했고, 당황 할 때마다 불 붙은 듯 파닥거리는 꼬리를 숨길 수는 없었지만 그의 짓궂은 농에도 빠르게 적응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영악하여 잠시 안일하게 생각한 사이 그라는 사람은 파도치듯 내게 밀려들어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의 앞에만 서면, 길을 거닐다 바람에 실려오는 그의 향을 맡으면, 후에는 그의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도 심장은 박자를 맞출 수 없게 제멋대로 날뛰어 어느 가을의 단풍처럼 천천히 그리고 붉게 물들어가는 제 볼을 감출 수가 없게 돼 결국에는 제 안에서 넘실넘실 차오르는 물결에 그를 뱉어내지 못하면 점점 차올라 자신의 숨통까지 틀어막는 지경에 이르러 그날 밤 나는 제 저고리보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부여잡고 하릴없이 끙끙 앓기만 하였다. 나는 제 몸속 모든 곳을 채워나가는 그가 미웠다. 내 원래 이런 이가 아니었는데 그로 인해 바뀌어버린 내가 두려워 가끔은 속으로 그를 질책하고 또 비난하며 제 안에 파고드는 그를 조금이라도 비워내기 위해 애썼으나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다가와 웃어주고 나를 제 품에 안아주는 그 덕에 매일 밤 고민하며 비워내려 애썼던 내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 차오르는 그 안으로 녹아들고 말았다. 바보 같은 정 소여. 방 안에 틀어박혀 제 머리를 쥐어뜯고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보아도 달빛 사이로 비추는 그는 변함이 없었고 그는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매일 제 꿈에 나타나 저를 품에 안고 제 귓가에 사랑을 속삭였다. 절로 짙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이제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벗어날 수 없었다. 그저 그라는 굴레에 대굴대굴 밀려들어가 나 하나 죽은 셈- 치고 그는 모르는 나의 마음을 곱씹고, 다시 곱씹을 수 밖에. 울어도, 지워도, 비워도 사라지지 않는 그의 존재에 또 다시 확신하게 된 나의 마음을 나는 덮어두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만일 제가 그를 오라비가 아닌 사내로 바라보고 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가 아무리 신경쓰지 않고 웃어 넘긴다고 해도 그의 마음과 제 마음은 전과 같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굳이 제 마음을 어설프게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또 하루. 눈이 오는 하루도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하루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하루의 시간도 모두 그와 나의 사이를 지나 아스라이 멀어졌고 나는 변함없이 다정하고 친근한 그의 누이라는 탈을 쓰며 늘 웃는 얼굴로 그와 마주했다. 그리 참으면 될 줄 알았다. 서늘한 겨울의 바람처럼 지나가는 시간, 그와 같이 그에 대한 나의 마음도 그 시간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 가 아무도 모를 산맥에 닿여 유리조각처럼 부서져 언젠가 탈을 벗고 진실된 웃음을 보이며 그의 앞에 설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불행히도, 제 믿음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지만.

붉게 타오르던 햇살이 산등새로 숨고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앉는 어느 길목. 늘 그렇듯 그 앞에 앉아 나는 떠오르는 달빛을 기다리며 주방에서 몰래 가져와 숨겨두었던 당근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어둠이 제 주변을 덮고 아름답게 울던 새들 대신 찌르르 하고 조용히 울어대는 논밭의 벌레가 내 귓가에 음악을 들려주었고 달님은 기다렸다는 듯 어둠과 함께 제 모습을 뽐내며 천천히 하늘 높은 곳으로 차올랐다. 언제 올라간 것인지 제 머리 끝에서 아른거리는 달님에 얌전히 덮고 있던 꼬리를 내리고 접혀 주름져 있는 제 치마를 툭툭 털어내 노란 반짝임이 스며든 달빛이 내려앉은 바위에서 내려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너무 늦었네, 늦잠을 잘지도 몰라. 분명 머릿속으론 서둘러 제 침소에 들어가 잠자리에 누워야 한다고 되뇌이고 있었지만 왜인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 느릿느릿 제 자리만을 서성였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어두운 밤의 바람이 제 살을 애워 싸도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한숨을 푹 내쉬며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이대로 자리에 눕는다고 한 들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더 깊이 잠들 수 있도록 산책이라도 하고 오자라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천천히 돌리자 귓바퀴를 타고 들어오는 쨍하게 울릴 정도로 큰 그의 목소리가 제 고막을 두드리며 누군가 제 몸에 안아들었다. 깜짝 놀라 몸이 굳고 꼬리와 귀가 경계하듯 쫑긋 섰지만 이내 제 코로 스미는 익숙한 향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어정쩡하게 들린 손을 그의 허리에 가져다 대어 꼭 끌어안았다.

" 밤이 늦었는데 이제야 오시는 겁니까? "
" 뭐 일이 있어서 그렇게 됐지. 누이는 아직 안자고 뭐하나- 혹시 나 기다렸어? "

네,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입 바로 앞까지 튀어나온 말을 꿀꺽 삼키며 최대한 미간을 찌푸렸다. 아아, 위험해. 이건 정말.. 또 제 꼬리는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또 끓어오르는 열기가 얼굴로 모두 쏠리는 듯 해 나는 말을 얼버무리며 그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장난스레 웃으며 왜 제 시선을 피하냐 쉴새없이 눈을 맞춰오는 그의 모습이 제 시야에 비출 때마다 서서히 피어나는 물안개는,

" 좋아합니다. "

제 안에 채워진 것은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아닌 채워지는 물과 같은 것이었다. 숨긴다고 숨길 수 없었다. 비우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았고 제 몸엔 그 물이 아무도 몰래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아 결국 쌓이고, 쌓여 출렁이는 그에 대한 감정이 달빛에 휩싸여 토해내듯 뱉어졌다. 좋아합니다. 그동안 쭉 그대를 연모해 왔습니다. 미안합니다 계속 숨기지 못해서. 우물이 무너져 새어내오는 물처럼 쉴새없이 흘러나오는 제 안에 묻어뒀던 감정은 그 끝을 비울 때까지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저 오라비의 곁에 좋은 누이로 남고만 싶었는데 왜 나는 그것 하나 참지 못해서. 저에 대한 화에 더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잘근잘근 씹어 꿀꺽 삼켜내자 아랫입술에서는 아릿하게 피 비린내가 피어올랐다. 입술에 난 상처로 서서히 스며드는 제 타액에 따가움을 느끼고 입을 벌리자 삼켰던 말들은 절로 역류해 와 막을 수 없이 쏟아졌다.

" 견가의 향을 핑계로 오라비에게 안겼던 것은, 오라비의 손을 잡아 품에 안았던 것은, 그대에게 입 맞춰 달라 말했던 것은. "
" 사실은, 모두. "

제가 노 해, 그대를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빛은 반짝이는 모래알처럼 눈부시게 그를 비추어 괜시리 눈가는 그 눈부심에 천천히 젖어가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나는 정말 나약한 사람이였을지 모른다.







그대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아도 좋다. 찬비에 젖어도 새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이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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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샨필모 2015. 12. 30. 22:24

1_바라보다


그 날은 하루종일 비가 추적추적 쏟아져 만연에 퍼진 습기로 인해 조금의 살결만 닿아도 불쾌해지는 피로한 날이었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손 끝이 아려와 석율은 제 손가락을 감싸쥐고 날씨에 비해 비교적 얇은 코트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석율의 손은 비교적 쉽게 식는 편이었다. 겨울이면 늘 차갑게 어는 석율의 손을 그래가 자신의 체온을 나누어 그를 녹여주어 석율이 그것을 느낄 틈이 없었지만 다가오는 이번 겨울이 특별히 서늘한 것인지 아니면 제 손난로 역할을 해주었던 그래가 없어서인지 더욱 싸늘하게 느껴지는 제 손은 아무리 비비고 움켜쥐어 코트 속에 집어넣어도 영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씁쓸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쩌다 이리 된건지 몇 번이고 함께 했던, 함께 할 것 같았던 겨울이 이번에는 석율, 그 혼자였다. 여름의 온도가 서서히 누그러지고 있음에도 희뿌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안개가 흐릿하게 시야를 맴돌았다. 속이 메스꺼워 구토감이 들었다. 그 이유가 서리한 날붙이처럼 따가울 정도로 불어오는 찬 바람때문인지, 주변의 온도에 쉽게 녹아들어 송장처럼 식어버린 제 손 때문인지, 늦은 퇴근으로 인해 쌓인 여러날의 피로가 몰려와서인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저를 완전히 무너트린 것이 다른 무엇의 이유도 아닌 장그래, 오로지 장그래로 인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나는 그저 너와 같은 분위기의 남자를 보았을 뿐인데, 네가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너와 닮은 남자가 다른 이의 손을 따스히 감싸주고 있는 것 뿐인데, 너일리가 없는데. 그를 바라보는 것이 이리 비참하고 서글플 수 있을까. 어지럽게 울렁이던 속은 하얀 눈밭에 굴려가는 눈덩이처럼 막을 수 없이 크게 불어나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따스히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굳게 마주잡은 그들의 손, 같은 곳을 향하는 발걸음. 코트 속에 쑤셔넣은 손 끝은 바늘로 찔리는 듯 따가워 나는 발걸음을 더 옮길 수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고통스러워 당장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그가 그 자리를 떠나간 후에도 나는 감히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그저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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