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내가 그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밝은, 능글맞은 또는.. 가벼움? 모든 이에게 다름없이 농을 건내고 빙긋 웃어보이며 그들을, 나를 품에 안는 그는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그저 같은 가의 사내일 뿐 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더 편히 대했고, 당황 할 때마다 불 붙은 듯 파닥거리는 꼬리를 숨길 수는 없었지만 그의 짓궂은 농에도 빠르게 적응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영악하여 잠시 안일하게 생각한 사이 그라는 사람은 파도치듯 내게 밀려들어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의 앞에만 서면, 길을 거닐다 바람에 실려오는 그의 향을 맡으면, 후에는 그의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도 심장은 박자를 맞출 수 없게 제멋대로 날뛰어 어느 가을의 단풍처럼 천천히 그리고 붉게 물들어가는 제 볼을 감출 수가 없게 돼 결국에는 제 안에서 넘실넘실 차오르는 물결에 그를 뱉어내지 못하면 점점 차올라 자신의 숨통까지 틀어막는 지경에 이르러 그날 밤 나는 제 저고리보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부여잡고 하릴없이 끙끙 앓기만 하였다. 나는 제 몸속 모든 곳을 채워나가는 그가 미웠다. 내 원래 이런 이가 아니었는데 그로 인해 바뀌어버린 내가 두려워 가끔은 속으로 그를 질책하고 또 비난하며 제 안에 파고드는 그를 조금이라도 비워내기 위해 애썼으나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다가와 웃어주고 나를 제 품에 안아주는 그 덕에 매일 밤 고민하며 비워내려 애썼던 내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 차오르는 그 안으로 녹아들고 말았다. 바보 같은 정 소여. 방 안에 틀어박혀 제 머리를 쥐어뜯고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보아도 달빛 사이로 비추는 그는 변함이 없었고 그는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매일 제 꿈에 나타나 저를 품에 안고 제 귓가에 사랑을 속삭였다. 절로 짙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이제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벗어날 수 없었다. 그저 그라는 굴레에 대굴대굴 밀려들어가 나 하나 죽은 셈- 치고 그는 모르는 나의 마음을 곱씹고, 다시 곱씹을 수 밖에. 울어도, 지워도, 비워도 사라지지 않는 그의 존재에 또 다시 확신하게 된 나의 마음을 나는 덮어두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만일 제가 그를 오라비가 아닌 사내로 바라보고 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가 아무리 신경쓰지 않고 웃어 넘긴다고 해도 그의 마음과 제 마음은 전과 같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굳이 제 마음을 어설프게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또 하루. 눈이 오는 하루도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하루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하루의 시간도 모두 그와 나의 사이를 지나 아스라이 멀어졌고 나는 변함없이 다정하고 친근한 그의 누이라는 탈을 쓰며 늘 웃는 얼굴로 그와 마주했다. 그리 참으면 될 줄 알았다. 서늘한 겨울의 바람처럼 지나가는 시간, 그와 같이 그에 대한 나의 마음도 그 시간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 가 아무도 모를 산맥에 닿여 유리조각처럼 부서져 언젠가 탈을 벗고 진실된 웃음을 보이며 그의 앞에 설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불행히도, 제 믿음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지만.
붉게 타오르던 햇살이 산등새로 숨고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앉는 어느 길목. 늘 그렇듯 그 앞에 앉아 나는 떠오르는 달빛을 기다리며 주방에서 몰래 가져와 숨겨두었던 당근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어둠이 제 주변을 덮고 아름답게 울던 새들 대신 찌르르 하고 조용히 울어대는 논밭의 벌레가 내 귓가에 음악을 들려주었고 달님은 기다렸다는 듯 어둠과 함께 제 모습을 뽐내며 천천히 하늘 높은 곳으로 차올랐다. 언제 올라간 것인지 제 머리 끝에서 아른거리는 달님에 얌전히 덮고 있던 꼬리를 내리고 접혀 주름져 있는 제 치마를 툭툭 털어내 노란 반짝임이 스며든 달빛이 내려앉은 바위에서 내려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너무 늦었네, 늦잠을 잘지도 몰라. 분명 머릿속으론 서둘러 제 침소에 들어가 잠자리에 누워야 한다고 되뇌이고 있었지만 왜인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 느릿느릿 제 자리만을 서성였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어두운 밤의 바람이 제 살을 애워 싸도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한숨을 푹 내쉬며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이대로 자리에 눕는다고 한 들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더 깊이 잠들 수 있도록 산책이라도 하고 오자라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천천히 돌리자 귓바퀴를 타고 들어오는 쨍하게 울릴 정도로 큰 그의 목소리가 제 고막을 두드리며 누군가 제 몸에 안아들었다. 깜짝 놀라 몸이 굳고 꼬리와 귀가 경계하듯 쫑긋 섰지만 이내 제 코로 스미는 익숙한 향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어정쩡하게 들린 손을 그의 허리에 가져다 대어 꼭 끌어안았다.
" 밤이 늦었는데 이제야 오시는 겁니까? "
" 뭐 일이 있어서 그렇게 됐지. 누이는 아직 안자고 뭐하나- 혹시 나 기다렸어? "
네,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입 바로 앞까지 튀어나온 말을 꿀꺽 삼키며 최대한 미간을 찌푸렸다. 아아, 위험해. 이건 정말.. 또 제 꼬리는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또 끓어오르는 열기가 얼굴로 모두 쏠리는 듯 해 나는 말을 얼버무리며 그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장난스레 웃으며 왜 제 시선을 피하냐 쉴새없이 눈을 맞춰오는 그의 모습이 제 시야에 비출 때마다 서서히 피어나는 물안개는,
" 좋아합니다. "
제 안에 채워진 것은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아닌 채워지는 물과 같은 것이었다. 숨긴다고 숨길 수 없었다. 비우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았고 제 몸엔 그 물이 아무도 몰래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아 결국 쌓이고, 쌓여 출렁이는 그에 대한 감정이 달빛에 휩싸여 토해내듯 뱉어졌다. 좋아합니다. 그동안 쭉 그대를 연모해 왔습니다. 미안합니다 계속 숨기지 못해서. 우물이 무너져 새어내오는 물처럼 쉴새없이 흘러나오는 제 안에 묻어뒀던 감정은 그 끝을 비울 때까지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저 오라비의 곁에 좋은 누이로 남고만 싶었는데 왜 나는 그것 하나 참지 못해서. 저에 대한 화에 더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잘근잘근 씹어 꿀꺽 삼켜내자 아랫입술에서는 아릿하게 피 비린내가 피어올랐다. 입술에 난 상처로 서서히 스며드는 제 타액에 따가움을 느끼고 입을 벌리자 삼켰던 말들은 절로 역류해 와 막을 수 없이 쏟아졌다.
" 견가의 향을 핑계로 오라비에게 안겼던 것은, 오라비의 손을 잡아 품에 안았던 것은, 그대에게 입 맞춰 달라 말했던 것은. "
" 사실은, 모두. "
제가 노 해, 그대를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빛은 반짝이는 모래알처럼 눈부시게 그를 비추어 괜시리 눈가는 그 눈부심에 천천히 젖어가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나는 정말 나약한 사람이였을지 모른다.
그대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아도 좋다. 찬비에 젖어도 새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이정하